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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dgybeats:

Hodgy Beats & Dom Genesis

Produced by Lex Luger 

2012

Take 100. 윤상욱,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시공사, 2012)

그럴듯한 소설 제목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과거 MBC 다큐멘터리 ‘지구의 눈물’ 시리즈의 「아프리카의 눈물」처럼.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에는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2006)와 《로드 오브 워(Lord of War)》(2005)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다른 얘기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ㅡ 소년병으로 끌려간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강제노역을 하며 발버둥치는 ㅡ 솔로몬으로 나온 디몬 혼수라는 배우는 《콘스탄틴(Constantine)》(2005)에서는 미드나잇이란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드나잇을 떠올리며 솔로몬의 얼굴을 보면 왠지 더 슬퍼진다. 멋들어진 시가를 물고 테이블을 내리치던 카리스마가,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오로지 아들을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바뀌어 드러날 때 말이다 ㅡ 물론 영화상에서의 이미지란 측면에서 느껴지는 것이긴 하지만. 각설하고, 어쨌든, 나는 아프리카에 대해 잘 모른다.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시작하자마자 5쪽 분량의 프롤로그는, 그래서 나와 같은 이들의 정수리에 망치를 때린다, 가차 없이. 4D ㅡ 죽음(death), 질병(disease), 재난(disaster), 절망(despair) ㅡ 의 대륙? 이런 가혹한 시각은 아프리카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인간은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라고 했던 데카르트에 반해 파스칼은 인간을 두고 허영을 가진 심정의 존재라 했다. 나는 후자에 속하고 또 그 말에 찬성한다(파스칼의 다른 논제들은 차치하고). 그가 말하는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 묻은 다이아몬드’를 원하는 것일 테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했던 말을 상기해보자.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체 자연과 조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이 책은 왜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며 그것(그들)을 ‘세계사의 미아’라고 했던가. 빈곤, 피 흘림, 왜곡된 사실, 부패한 정부, 자원 강탈, 착취. 특히 전쟁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소년병이 되어 내전에 내몰리는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솔로몬의 아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이들은 살인, 강간, 약탈,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성장한다. (이상한 말이지만)당연히 많은 전과를 올린 이는 반군의 지도자로 크게 되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총알받이가 된다. 사실 이런 ‘아프리카의 혹독한 겨울’에 대해 말하자면 수많은 예가 인용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말한 독재와 폭력의 희생자인 소년병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에 비해 빈곤하지 않은 아프리카 땅 ㅡ 의 자원 ㅡ 을 노리는 세계의 기업들, 마지막으로 그런 아프리카를 잔뜩 왜곡하며 보는 우리의 눈이 있겠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책에서도 잠시 언급되는 남아공의 두 번째 민선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의 연설 「나는 아프리카인이다(I am an African)」는, ‘African’이란 단어 자체만으로도 아프리카 땅을 그들의 아프리카로 오롯이 밝혀주는 느낌이다……! 400쪽이 조금 못 되는 텍스트로 가려졌던 세계를 얼마나 다시 볼 수 있겠냐만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라는 뜨끔한 문장 하나로 시작되는 과거와 현재의 아프리카는 기존의 패러다임과 우리의 스펙트럼을 뒤틀기에 충분하다.

Take 99. 장 자끄 상뻬, 『뉴욕의 상뻬』 (미메시스, 2012)

미메시스에서 새로 출간된 상뻬의 작품집이다. 《뉴요커》지의 표지를 1978년부터 2009년까지 30년 이상 장식해 온 상뻬의 그림 150여 점이 수록돼 있다. 물론 인터뷰도 함께. 《뉴요커》에 게재된 작품(원화)들은 실제 잡지의 표지와 함께 양쪽에 배치되어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며 볼 수도 있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냥 보자 ㅡ 바로 아래 사진은 『뉴욕의 상뻬』와 함께 붙어있는(?) ‘상뻬 드로잉북’인데, 무선으로 되어있어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면 되겠다.




따라 그려본 상뻬 그림으로 마무리.

Take 98. 히가시노 게이고, 『독소소설』 『흑소소설』 『괴소소설』 (바움, 2007)

히가시노 게이고 ㅡ 하면 『변신』, 『용의자 X의 헌신』, 『탐정 클럽』 정도밖에 읽어보지 않았다.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완전히 실망했었으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정말 (더럽게) 재미없었다. 그런데 이 블랙 유머 소설은 왜 읽었느냐……. 추리 · 미스터리에서 크게 뎄는데도 이거라면 한 번 읽어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이건 제대로 당첨이었다. 재미있다. ‘우하하하하하’ 하며 몸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고, 그저 혼자 미친놈처럼 킥킥대며 웃었다. 잔뜩 비틀고, 이면을 들여다보고, 흠칫하게 만들고, 뭔가 특별한 웃음을 준다. 이것 말고는 세 권의 책을 설명할 방법이 없군. 음.

Take 97. 최종규, 『뿌리 깊은 글쓰기』 (호미, 2012)

『뿌리 깊은 글쓰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에는, 나는 100%까지는 동의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좋은 말 · 올바른 말을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된다는 거다. 사실 책에 나온 대로 모든 말을 억지로 고치게 되면 굉장히 어색할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뿌리 깊은 글쓰기』를 읽으며 아, 앞으로는 이렇게 고쳐 말하고 쓰는 게 맞는 거고 당연히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게 아니라, 우리말의 뿌리를 알고 바른 표현을 습득해 그것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본문에서 ‘나무 벤치’를 ‘나무 걸상’으로 다듬는 부분. 당장 이렇게 바꿔버리면 혼란스럽다. 의사소통 과정에서 의미가 잘 흐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신 저러저러한 ‘미국말’은 이러이러한 우리말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정도만 알고 가면 되겠다. 물론 나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도 있고 거부감 드는 설명도 있다. 「저 같은 사람들이야 ‘싱글 맘’이나 ‘싱글 대디’가 낯설 뿐 아니라 낯부끄러운 낱말이라 느끼지만, 이 나라 구석구석 이 낱말이 두루 퍼집니다. 이 낱말을 쓰는 분들은 더없이 당차고 떳떳하며, 영어로 가리키는 당신들 이름이 번듯하다고 느낍니다.」(p.185) ㅡ 바로 이 부분, 첫 문장은 아무렇지 않게 읽었지만 그다음 말이 우습다. 대체 누가 당차고 떳떳하며 번듯하다고 느끼는가. 물론 그런 이들도 있겠지만 ‘싱글 대디’를 ①아버지와 아들네 ②아버지와 딸네 ③아빠만 있는 식구들, ‘싱글 맘’을 ①어머니와 딸네 ②어머니와 아들네 ③엄마만 있는 식구들, 이렇게 바꿔버리면 지금으로선 어색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우리말 표현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쓰기는 버거워 보인다. 그럼 무조건 짧고 간편하게만 고치면 뭐든 괜찮다는 거냐,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취지도 알겠고 이해도 되지만 용납되지 않는 부분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앞서 말했다. ‘이해하고 알고 있으면 된다’고.

참 좋고 흥미로운 책이며 아, 그래, 잠깐만 생각해보면 예쁜 우리말이 있었지,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부분적으로 왠지 강요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그러나 화내기 전에 생각해보자. 나는 ‘우리말’을 얼마나 알고 있었나?